200524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 마16:21-28 / 조재진목사

May 27, 2020

마태복음 16:21-28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7)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여기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차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분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고백의 차원이라면,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삼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삶의 차원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차원의 균형을 이루며 신앙 생활하는 것을 건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균형 있는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고백하는 것은 잘합니다. 예배에 참석하여 찬송하고 기도합니다. 때로는 두 손을 들고 찬양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배가 다 끝나고 교회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예수님을 그냥 교회에 두고 나갑니다. 교회 밖의 삶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이 내 방식, 내 경험, 내 성질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살아가는 모습은 하나님 모르는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자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조롱합니다. ‘예수 믿어봤자 우리와 다를 바 없네!’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지난 주일에 나눈 말씀과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에 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대답하자 주님은 너무나 기뻐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라고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놀라운 축복을 베드로에게 쏟아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자 본문 22절을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여기에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면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 ‘그런 일이 결코 주님께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될 것을 말하자 베드로는 그 일을, 그 길을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베드로가 ‘항변했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επιτιμαν(에피티만)’이라고 합니다. ‘비난하다, 책망하다, 꾸짖다’라는 뜻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마 16:16)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그런 예수님을 에피티만, 꾸짖고 비난하면서 ‘절대 안됩니다. 주님,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구속사의 큰 흐름을 방해하는 인간적인 발상이요, 악한 사탄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문 23절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3) 보십시오 주님은 베드로를 보고 ‘사탄아!’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σκανδαλον μου ει; 스칸다론 무 에이)라고 꾸짖었습니다. 이 말은 ‘너는 나에게 장애물(방해물)이다’(you are an offense to me)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조금 전에 주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베드로를 칭찬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베드로를 주님은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굉장한 말씀을 해 놓고. 그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늘의 열고 닫는 축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그 베드로에게 주님은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정말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뜻밖이고 충격적으로 들리면 들릴수록 그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네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악한 사탄이 베드로를 이용해서 교묘하게 덫을 놓고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꼭 필요한 메시야의 사명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인간적인 감정에 이끌려서 ‘그리 하지 마옵소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지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술수에 말려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막는 사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판단을 앞세우는 사람은 사탄 편에 선 사람과 같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어떤 것인지, 참된 제자가 되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자 본문 24절을 찾아서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에서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원래 제자란 스승에게 ‘배우는 사람’(헬라어로 ‘μαθητής’;마데테스)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주님은 ‘나에게 배우려거든’이라고 하지 않고 ‘나를 따라오려거든’(ελθειν; 엘데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제자는 단순히 배우는 자가 아니라 ‘따르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배워서 아는 사람을 참된 제자라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삼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참된 제자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배우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까? 주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한번 따라해 볼까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첫 걸음은 자기를 부인(부정)하는 것입니다. ‘부인 한다’는 말은 ‘No’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No’라고 하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삶의 주인을 ‘자기 자신’으로 여겼다면, 삶의 주인을 ‘예수님’으로 바꾸고 예수님에게 ‘Yes’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만 것입니다. 거꾸로 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대해 ‘No!’라고 하고, 무엇에 대해 ‘Yes’라고 하고 있습니까?

또 주님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한마디로 ‘죽으라’는 말입니다. 스웨트 교수는 마가복음 주석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을 유죄선고를 받아 형벌을 받으러 가는 사람의 위치에 두는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당시에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다 사형장으로 가는 죄수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날마다’라는 단어를 덧붙여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지는 것’이 날마다 우리 안에 일어나야 하는 내적 결단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 곧 ‘내가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한번 따라 해 볼까요? ‘나는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살고!’ 그렇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같은 말, 곧 자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아의 죽음이 참된 제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기도할 때, 주님께서 ‘너 죽어야 돼!’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김익두 목사님은 그야말로 개과천선한 분입니다.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악독한 깡패였던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된 후 선천 시내에 볼일이 있어 갔을 때 술집 기생을 만났습니다. 김익두가 못 본척하고 지나가자 그 기생이 소리를 지르면서 따라왔습니다. “김 선생님, 저 모르시겠어요?” 김익두가 돌아보면서 조용히 물었습니다. “누구시죠?” “저예요 저 미향이에요.” 그때 김익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는 너이지만 나는 내가 아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아예 자기 부고장을 선천시내에 돌리기로 했습니다. 옛사람 김익두는 죽고 새사람 김익두로 살겠다는 단호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강패 김익두 죽다!’라는 부고장을 받고 다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많은 시장 한복판에 그 죽었다던 김익두가 나타났습니다. 목사가 된 그의 손에는 시커먼 성경책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의 등장에 사람들은 놀라기도 했지만, 그 중에 어떤 사람은 변화된 그를 시험해 보려고 지나가는 김익두 목사에게 구정물 한 통을 뒤집어 씌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물을 툭툭 털어내고는 물 끼 얻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옛날 김익두가 죽었다는 그 사실을 기뻐해라. 살았다면 너는 요절이 났을 것이다.” 여러분은 과거의 자아는 죽고 새로 태어났습니까? 아니면 옛 자아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습니까?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둘째,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자 본문 25절을 찾아서 같이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여기서 주님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고, 나를 위해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목숨’은 헬라어로 ‘프쉬케(ψυχη)’라고 합니다. 이것은 육체적 생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른 말로 ‘자아’, 혹은 한 사람의 ‘인격’, 생각하고 느끼고 계획하고 결정하는 자기 자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본문을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아를 살리려고 하면, 다시 말해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있으면 참된 생명을 잃을 것이요, 반대로 나를 위해 자기 자아를 내려놓으면, 그는 참된 생명을 찾을 것이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세우려는 노력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너희 자신, 곧 너희의 참된 자아를 찾는 길이며, 나의 길이다” 그렇습니다. ‘자기 목숨을 잃는 자’란 자기 자아를 세우려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의탁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와 같이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고 예수를 붙잡을 때 비로소 참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자아의 죽음’을 이렇게까지 강조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안에 옛 자아가 그대로 살아있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기생각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실패로 얼룩진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가정생활에서 실패합니다. 집사요 권사이면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채, 메마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는 예수님이 함께 계셨는데도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요 2장) 또 갈릴리 호수에서는 주님의 제자들이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요 21장)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데도 이렇게 실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 자기 자아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서 자기 성질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없습니다.

요즘 세대를 영어로 ‘Me Generation’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만 아는 세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맞는 것 같습니다. 가끔 예외는 있지만, 현대사회는 철저한 이기주의, 개인주의 사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결혼 생활이 굳이 행복하지 않더라도 자녀들을 위해 참고 사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것 없습니다. 결혼 생활하다가 사랑이 식어졌다고 생각되면 너무나 쉽게 이혼이라는 길을 선택합니다. 회사 생활도 그렇습니다. 기업 구조가 바뀐 탓도 있지만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월급을 더 주든지 대우가 더 좋으면 서슴지 않고 회사를 바꿉니다. 심지어 자기 회사 산업기술까지 빼내어 팔아먹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과연 행복하겠습니까? 아마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라고 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자’는 어떻게 된다고 하셨습니까? 주님은 ‘찾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찾으리라(ευρησει; 유레세이)’는 말은 ‘구원하리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무엇을 ‘얻는다’는 말이라기보다 더욱 완전하고도 충만한 상태, 주님으로부터 오는 ‘뜻밖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는 결국 참된 생명, 영생을 얻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육신의 목숨’과 ‘영생’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까? 물론 육신의 목숨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영생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육신의 목숨이야 70년, 80년의 문제이지만 영생은 그야말로 내세, 영원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동안의 육신의 목숨을 위해 영생을 잃는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이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26절)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날 무디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고 교인들에게 숙제를 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7장 22절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는 구절을 주면서 일주일동안 깊이 생각하라는 숙제였습니다. 이 말씀은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유월절 특사로 죄수 하나를 사면하는 전례에 따라 빌라도는 예수와 바라바 중에 누구를 놓아주면 좋겠느냐고 묻자 당시 유대인들은 영생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버리고 현실에 유익을 주는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그때 빌라도는 고민에 빠져서 이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냐?” 산곡교회 성도 여러분도 이 숙제를 한번 풀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를 따르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를 버리고 바라바를 선택하겠습니까? 육체의 목숨입니까? 아니면 영생입니까?

 

하늘의 상급이 따릅니다.

 

셋째, 그렇다면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육체의 목숨보다 영생을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거기에는 하늘의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 본문 27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여기에 보면, 주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가지고 그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와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보상에 대해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참 마음이 아픕니다. 은퇴를 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 열심히 은퇴준비는 하지만, 장차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는 하지 않습니다. 세상 재물을 쌓고 있으면서도 천국에 보물을 쌓아두려고 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기는 원하면서도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어떤 평가를 하실 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덕정감리교회 문병하 목사님께서 페이스 북 ‘예화공작소&희망충전소’에 올린 글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뉴질랜드에서 다른 나라로 팔려가는 소들이 배를 타고 거의 한 달씩 항해를 하게 되는데, 배에서 마른 풀 한 줌을 가지고 서로 뿔을 대고 싸웁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소들이 싸움을 멈추고 마른 풀을 먹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가까워진 육지의 풀 냄새를 맡은 것입니다. 소들에게는 풀과 육지가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냄새를 인하여 소망이 생겼고, 그 소망을 인하여 마른 풀을 가지고 싸울 마음이 없어진 것이다.”

왜 사람들이 육신의 목숨, 육체적인 욕망에 붙들려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것은 천국 냄새를 맡지 못해서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와서 심판하겠다’는 말씀이 공수표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28절) 이 말씀은 제자들이 죽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대부분은 주석가들은 ‘그 왕권을 가지고 온다’는 말씀을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성령 강림과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성령의 강림, 그리고 사도행전의 역사, 이 하나하나가 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왕권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입니다. 이 말씀대로 왕권을 가지고 오신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 바로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사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온갖 것을 다 얻고도 영생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은 기껏 살아야 70-80년인 이생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영생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늘의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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